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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조센징'이라는 어휘는 단순히 '조선인'을 지칭하지 않았습니다. 미개한 피지배 식민지인을 의미했습니다. 가치중립적이었던 조센징이라는 말에 부정적인 의미를 덧씌운 건 일본제국주의자였습니다. 광복을 맞은지 수십 년이 지난 2018년에도 일본인이 조센징을 언급하면 멸칭인지 아닌지 맥락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엔 우익이라 불리는 일본제국주의자는 여전히 악의를 가졌기 마련입니다.

토끼를 잡은 허클베리 핀


마크 트웨인 작 <허클베리핀의 모험>에는 abolitionist라는 어휘가 나옵니다. 노예해방운동가, 노예제폐지론자 정도로 번역합니다. 2018년 기준으로는 나쁠 게 없는 말입니다. 인종차별은 당연히 나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허클베리 핀(허크)은 이 말을 나쁜 뜻으로 씁니다. 흑인노예이자 허크의 친구인 짐이 도망가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밀고하지 말라고 당부한 직후입니다.


People would call me a low down Abolitionist and despise me for keeping mum - but that don't make no difference.

고발 안 한다고 해서 날 보잘것없는 노예 폐지론자라고 부르고 깔보고들 하겠지만 놈들 맘대로 하라고 하시지. 그렇게 하든 말든 아무 상관 없어. (민음사 김욱동 번역)

소설 배경은 미국 링컨 대통령이 노예를 해방하기 이전입니다. 허크는 도망계획을 발설하지 않을 정도로 흑인노예인 짐과 친했어도 abolitionist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봅니다. 위 구절 외에도 허크가 모범적인 신사라 여기는 친구 톰 소여가 '검둥이'를 해방하는 일에 동참하자 무척 놀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abolitionist는 직역하면 폐지론자 정도가 될 겁니다.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은 묘하게도 흑인노예가 탈주하도록 돕거나 그에 따른 가택침입과 같은 구체적인 행위를 하나하나 지칭하는 대신 암묵적으로 커다란 개념을 비난했습니다. 탈주바람잡이, 탈주노예 방조, 탈주공범, 노예탈취범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노예제 폐지나 노예해방 자체가 나쁘다는 여론을 형성했습니다. '조선인'을 멸칭으로 바꿨듯이 '노예제폐지론자'를 구질구질한 불만세력을 지칭하는 말로 오염시킨 셈입니다.


이 같은 현상은 2018년에도 나타나는 형국입니다. 페미니즘_feminism은 성별로 인한 차별에 반대하는 주의입니다. 나쁠 게 없습니다. 꽤 많은 남성기득권자가 '여성차별이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다만 2018년 현재는 양성평등을 할 만큼 했기에 페미니즘을 운운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표명합니다. 이들은 심지어 페미니스트라는 어휘를 멸칭으로 씁니다. '너 페미냐?', '쟤 페미야.' 이런 식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비슷할까요? 뭔가 잘못했다면 잘못한 점을 지칭하는 말을, 모자라다면 모자란 점을 지칭하는 말을, 해롭다면 해로운 점을 지칭하는 말을 써야 합니다. 무턱대고 조센징, 노예해방론자, 페미니스트를 나쁘다고 하는 데에는 악의가 숨었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땅에서 페미니스트가 가야 할 길은 자명합니다. 페미니즘이 역사 속에 승리와 진전을 뜻하는 말로 남게 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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