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이승만과 박정희는 같은 편이 아니다, 근본 없는 모자란 것들아.

wizmusa 2024. 10. 3. 21:56

몇 년 전부터 한국의 극우세력은 명실상부한 학살자인 전두환, 노태우와 범죄자로 처벌 받은 이명박근혜를 칭송하지는 못하겠으니 이승만과 박정희를 내세워 정당성을 내세우려고 한다. 둘을 같은 편처럼 이야기하는 꼬락서니에 눈쌀이 찌푸려져서 각각의 공과는 잠깐 접어두고 박정희와 이승만 간 관계를 요약하고자 한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은 하야했다. 기성언론은 이승만이 국민의 요구에 순응했다고 거짓말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6.25 동란 때에 미국 정부는 이미 이승만에게 학을 뗐다. 기분 나쁘게도 일본 위주로 동아시아 정계를 재편하려던 미국 정부는 지지율이 낮아 부정선거를 저지르다가 국민에게 발포까지 하며 국방에까지 혼란을 재차 야기했던 무능하고 욕심만 많은 이승만을 더이상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승만이 4월 27일 대통령직을 사임하자 워싱턴 정가에 한국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이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이에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대통령이 4월 27일 기자회견을 갖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부정선거에 관한 우려를 "우호적인 태도로" 표명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1960년 4월 28일 아이젠하워가 "미국은 어떠한 종류의 간섭도 절대 한 적이 없다 (no interference of any kind was ever undertaken by the United States)"고 단호하게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달리 미국 외교문서는 4월 혁명 과정에서 미국이 지나친 간섭과 도를 넘는 압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한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앞에서 밝혔듯, 주한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 그리고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 등이 깊이 개입했다.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 프레시안. 이승만 하야, 미국의 내정간섭 결과였다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4월 혁명과 미국의 개입. 2018/04/05)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91778

 

혼란을 틈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 자리까지 차지한 박정희는 이승만이 펼친 정책과 선을 그으며 이승만을 비판함으로써 미국 정부에게 신뢰를 얻고자 했다.

"대한민국이 수립되어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헌법이 규정되었지만, 그것은 한갓 문서상의 추상적 규정이었을 뿐이었다. 정부가 그것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러한 자유권을 스스로 짓밟기가 일쑤였다. 이리하여 정부의 유린에 시달리게 된 자유는 '정부의 강압에서 벗어나려는 자유', '정부의 탄압에서 벗어나려는 민권'의 형태로 싸웠던 것이 자유당 치하였다." (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갈 길>, 동아출판사, 1962, 40-41쪽)
"해방 16년에 남한에서는 이승만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부패한 자유당 관권 중심의 '해방 귀족'들이 도량(RK)하여 민족의 장래는 어두워만 갔다.... 마침내는 4•19의 반독재 학생혁명을 유발하고 말았다." (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갈 길>, 동아출판사, 1962, 125-126쪽)

5.16 이후 서울 시내를 돌며 조리돌림을 당하는 정치 깡패 이정재 ⓒ 위키미디어 공용

이승만 정권이 혐의가 농후한 이정재를 보호하고자 꼬리 자르기를 한 것은 자신들과 이정재가 한편임을 시인하는 꼴이 됐다. 일반 깡패는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만약 일반 깡패가 그런 혐의를 농후하게 받았다면, 국가권력의 입장에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1950년대 사람들에게 각인된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깡패 정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김종성. 오마이뉴스. 종로3가에 울린 총성... 대통령과 한편인 깡패들. 2024/08/20)
https://v.daum.net/v/20240820120032283

 

독립운동가이자 이승만 하야를 요구했던 김창숙 선생이 타계한 다음 날인 11일, 며칠 전 그를 문병했던 박정희 의장은 그의 빈소에도 직접 찾아와 몸소 무릎을 꿇고 조의를 표했다.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 때 부정선거에 나섰던 정치깡패를 처벌하고 독립운동가이자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여 테러를 당하기도 했던 심산 김창숙 선생(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0942&docId=1073202&categoryId=37713)을  문병하고 조문하는 따위 행보를 보이며 철저히 이승만을 부정했다. 이로써 당시 국민들에게 신뢰를 얻기도 했다. 나아가 이승만 귀국을 철저하게 막았다.

이들 문서에 따르면 이승만 전대통령은 62년 3월 망명지 하와이에서 「사과성명」을 발표한뒤 귀국을 시도했으나 박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귀국을 고집하면 그와 프란체스카여사의 여권을 취소하라』며 절대 귀국치 못하게 호놀룰루 영사관에 강력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유민, 이도운. 서울신문. 「이승만 귀국」 박정희가 막았다/“고집땐 여권취소” 총영사에 훈령. 1995/01/16)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19950116002001

 

박정희가 저렇게 이승만을 부정했건만, 심지어 그러한 부정이 불의하지 않건만 작금의 근본 없는 매국노들은 모른 척하고 저 둘을 나란히 국부로 묶으려 한다. 도무지 내세울 사람이 없어서 그 지경인 형국이다. 사람 목숨이 귀중한 줄 모르는 모지리들이니 전부 국외로 추방해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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